2008년 4월호



 


[우리 유물 유적 둘러보기]  

 


 오래된 미래, 범어사를 위하여 / 문화관광해설사 안현아
     

 


언 범어사로 자원봉사 할 근무지를 옮겨온 지도 이 년. 부처님의 공덕으로 천 삼백여 년이라는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에게 되돌아볼 안식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는 역사적 장소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므로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느껴야 할 곳도 많아서 절 자체에 대하여 말하기는 쉽지 않아 포기하고 일갈할 거리가 떠올랐기에 몇 자 적어본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가까이에서 항상 접하는 이보다는 멀리서 온 이가 더 객관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경험하곤 한다. 범어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멀리서 온 관광객들이 절이 정말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덧붙여 물어보곤 하는 게 뭐가 좋은가 하는 거였다.
그럴 때 내방객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게 큰듯하면서도 그리 번잡스럽게 크지도 않고 산세랑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져서 상당히 볼 만하다고들 하는 것이었다.
나 자신도 부산토박이지만 학창시절 한두 번 소풍을 다녀온 것 외에는 별로 방문한 일이 없다가 자원봉사를 하러 자주 오면서 가진 느낌이 위와 비슷하였다. 사계절마다 다르면서 뚜렷한 변화가 주는 맛이 얼마나 독특하고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이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주산인 금정산을 중심으로 계명봉과 원효봉이 병풍처럼 둘러친 가운데 세워져 있는 절이 풍수지리에 대하여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게 하는 곳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초기불교시절, 최초의 승원(僧園)인 죽림정사를 지을 때 인도 당시 최강국 마가다국 왕인 빔비사라 왕이 수도인 라자그리하에 입지를 선정하는 기준이 다음과 같았단다.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고 오고 가기에 편하며, 이런저런 목적을 지닌 사람들이 찾아뵙기도 좋고, 낮에는 지나치게 붐비지도 않고 밤에는 소음이 없고 인적이 드물며, 혼자 지내기에 좋고 좌선하기에 적절한 곳, 바로 그런 곳.' 바로 범어사가 '딱'이라는 세속어가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가 방문해보거나 익히 들어 아는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가 번잡스럽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방만한 느낌이 있는 반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위와 같은 원을 세우는 입지 기준에 맞는 곳이 바로 범어사라는 걸 윗글을 읽으면서 새삼 확인하였다.

  부처님 열반 이후 100년경부터 사상 논쟁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중관사상 정립을 필두로 유식학, 천태종, 화엄종이 성립하게 되는데 화엄종의 성립 시기가 또 바로 범어사가 세워지는 때와 궤를 같이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전래한 한국 화엄종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기틀을 조성하였고 고려시대 균여대사와 보조지눌국사에 이어 조선시대 김시습과 유일 등 여타 스님들에게로 전해져 내려오게 되었다.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펼친 화엄경을 종횡(縱橫)으로 화엄종이라는 체계를 이루었는데 그 경의 방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평생 공부하여도 다 못할 정도란다.

  범어사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최치원(崔致遠)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일연(一然)스님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화엄 십찰(華嚴 十刹) 중 하나로 다 같이 언급하고 있고 숙종 대(1700) 제월 담권(霽月 曇捲)의 고적(古蹟)과 영조 대(1746)  의상스님의 제자인 표훈(表訓)스님이 지은 유사(遺事)와 합철된 동계(東溪)스님의  범어사창건사적(梵漁寺創建事蹟)에도 있다고 한다.
범어사라는 절 이름 자체에 관련하여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이렇듯 역사적 배경을 가진 범어사의 가람 배치는 화엄경의 이상향인 화장세계를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던가.
더불어 아미타불을 주불로 신봉하는 정토종도 화엄종과 비슷한 시기에 성립하였고 점점 다불시대로 나아가게 된 불교는 4~5세기경 대일정경과 금강정경을 종지로 하는 밀교로 유행을 달리하여 한국에는 8~9세기경에 전해졌다. 다음으로 대승의 선사상이 등장하게 되는데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고대 명상법인 요가의 흔적이 발굴되었다는 것으로 선(禪)의  역사가 오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6세기 초에 살았을 것으로 알려진 27대 달마대사가 중국 숭산 아래 소림사에서 선종의 초조로 법을 펼친 후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에 이르러 법이 한층 수승하게 되었고 특히 6조 혜능대사가 법을 펼친 조계사에서 한국 선종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범어사 일주문의 별호가 바로 조계문이니 역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범어사 역사를 보면 불교사가 보이고 불교사를 보면 범어사 역사가 보인다.

  선종의 개산조(開山祖)는 신라 구산선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을 연 도의(道義)로되 중흥조가 고려 지눌(知訥)이고 조선조 휴정(休靜)과 사명(四溟)으로 이어져 근대 경허(鏡虛), 용성(龍城), 만공(滿空)에 이르렀다. 그즈음 범어사에서는 동산(東山)스님께서 득도(得道)를 하셔서 그분이 가시는 곳은 항상 사람이 넘쳐날 정도로 훤하신 법을 펼치셨다는데 서울 조계종 본사에서 살림이 궁핍하면 동산스님을 억지로 모셔가곤 한 것이 신도를 몰고 오셔서 그러고 나면 한층 사정이 나아지곤 하였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현재 한국불교는 일제강점기에 훼손되기 시작하여 종파가 수십을 넘어 백 여에 이르니 이렇다 저렇다 할 것도 없을지 모르겠으나 중심 종파인 조계종은 선종의 맥을 잇는 통불교라고 일컫는다는 것까지 범어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들이 이렇듯 많고 많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소위 386세대 이후 사람들은 한옥에 살아본 경험이 적을 것이고 요즘 학생세대는 아파트가 주된 살림집인 줄 알고 있을 지도 모를 정도로 전통가옥이 접하기 힘든 시기이다. 가끔 초등학생들에게 범어사 집에 대하여도 물어보면 그다지 큰 감흥이 있는 것 같진 않고 그저 특이하게 생긴 집이라고 하였고 그나마 살아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살고 싶다거나 포근하다거나 또는 안정을 얻는다고도 하였다.
어쩜 몇 세기를 지나면서 범어사 같은 전통 사찰은 구경하기가 더 어려워질지도 모를 일이다. 웬만한 절이면 불사를 한다고 그저 부수고 크게 짓기에 급급한 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범어사도 예외에서 벗어날 수 없는 듯 보제루(普濟樓)가 일제 때 부동산 등기부등본에 누락되었다는 말이 들리더니 이제는 그걸 헐고 지하공간도 쓸 수 있게 개축할 거라는 말도 들린다.
가끔 오랜 사찰 건축에 관심이 있는 듯한 이들이 와서 흔히 대웅전이 보이게 아래를 뚫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둥 하는 말을 들을 때면 산비탈에 지어진 절이라 그리 하여야 기운이 아래로 한 달음에 달아나는 걸 막아 주는 형상이 되어 괜찮은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 쪽에 설법전이란 큰 법당도 지어놓았으니 오히려 옛날 그대로 보제루 창을 모두 살려서 쉽게 열 수 있도록 하여  관광객 누구나가 앉아서 대웅전을 바라보게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해 보기도 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범어사를 사적(史蹟)으로 지정하여 보존하는 건 또 어떨까 싶어서 담당 공무원에게 질문을 하였더니 그것도 생각해 봐야겠다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가끔 그리 지정되면 불편함이 많아서 꺼린다고들 하던데 어디가 불편한지 어떻게 조금 손을 보면 한결 보전도 하고 살기도 나을지를 전문가를 청하여 같이 고민하고 먼저 다가가서 편의 시설을 어울리게 제의한다면 모르면 모를까 싫어할 리가 없다고 자신해 보면서 옛 것을 오늘에 살려 미래를 향한다는 차원에서라도 범어사를 잘 지켜나가자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본다.
 
12738442@hanmail.net

<참고자료>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불교사의 이해, 조계종출판사, 2007
- 김광식, 동산대종사와 불교정화운동, 영광도서, 2007
- 채상식 외, 범어사, 대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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