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호



 


[역사의 별, 부산의 인물]  

 


 부산 근대사의 <박기종> / 문화관광해설사 김순옥
     

 



기종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다되어 가지만 부산 곳곳에 그의 자취가 남아있다. 근대의 꿈을 실었던 철도는 한 번도 달려보지 못 하고 실패하였지만, 그는 부산 최초의 근대학교의 설립자, 부산항 상무회의소의 설립자, 우리나라 민간인철도자력부설운동의 선구자 등 부산근대사 또는 한국근대사에 큰 자취를 남긴 것만은 틀림없다.

  박기종은 1839년 11월27일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좌천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자는 형진(亨珍), 본관은 밀성(밀양)이다. 부(父)는 박영순 모(母)는 오씨, 처(妻)는 윤씨이다. ‘부산부사원고’에 따르면 1884년 당시 박기종이 동래부 별장으로 구부산관(舊釜山館:왜관)통사(通事)가 되었다고 한다. 별장은 동래부 무청인 작대청(作隊廳), 수첩청(守堞廳), 별기위청(別騎衛廳)의 최고 무임(武任)직이다. 무청은 군사, 경찰을 업무로 담당하는 기구이었다.
1906년 (광무 10년)11월에는 박기종, 김낙준, 김준호, 등이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柔遠閣先生感古碑:부산시립 박물관 뜰에 있음)를 세웠다. 이 비는 대일 업무에 종사했던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비문에 적힌 ‘유원각선생’은 통사청에 근무했던 소통사라고 한다. 소통사는 일본인 역관인 훈도, 별차를 보조하면서, 왜관의 각종 실무에 종사한 동래부 소속의 하급통역관 이었다. 박기종은 계장으로서 비를 세우는데 주도적인역할을 하였다.

  박기종의 넷째사위 윤상은의 회고담에  따르면 박기종의 개항 전 경력은 동래상고도중(東萊商賈都中)에 드나들면서 일본어와 상업을 배워  조선상인과 일본상인 사이에서 거간 일을 맡아 본 것으로 추정 하는 게 고작이었다.
개항전인 1869-1871년 당시 동래부 소통사로 활약하였다. 특히 1869년에는 소통사 중에서도 거제도 옥포를 담당하는 옥포통사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빠른 경력이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가 맺어진 후 그해5월에 김기수 수신사(修信使)가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개항 후 최초의 대외사절단 통역을 맡은 것은 일본어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어 실력은 소통사 경력의 산물이었다.
그가 세운 개성학교는 1896년 3월1일 100명의 학생으로 영주동 교사에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개성이라는 교명은 ‘주역’의[개물성무(開物成務)]에서 따온 것이다.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제 시행하여 성공한다.]는  뜻이다. 수신사행 때 참관했던 개성학교(동경대학의 전신)와 같은 학교가 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겼을 것이다. 1908년 3월 정부로부터 보조금 단절 통첩이 와서 경영이 어려워지자 학교를 학부에 헌납하고 학교자리에 공립부산 실업학교와 공립부산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두 학교는 현재 개성고등학교(구 부산 상업고등하교)와 봉래초등학교로 맥이 이어지고 있다.
1886년10월 부산항 경찰관에 임명되었다. 그 재직 기간에 기선회사설립에 착수하였다. 설립 초에는 소형기선 1척 판선 여러 척을 끌고 구포, 삼랑진, 등을 왕래하면서 이익금의 십분의 일을 받는 영업을 하였다. 그러나 11월 30일 배가 낙동강 하구에서 침몰하여 선원이 모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경영의 위기를 맞이하여 기선회사의 영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1898년 박기종은 외부참사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필생의 소원인 철도건설에 주력을 하게 된다.
낙동강하구에 위치한 하단포는 구포와 함께 수운을 이용한 화물의 집합지였다. 하단 부근은 매년 많은 배가 침몰하는 위험한 곳이었다. 부산항과 하단포를 연결하는 약6킬로미터의 경편(輕便)철도인 부하철도 회사설립을 인가 받게 되는데 이것을 조선 최초의 민간철도회사 창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자금난이라든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가운데 노선 중간에 위치한 해발 130미터의 대티고개의 공사라는 커다란 난관으로 결국공사는 중단되었다.1899년 발기한 대한 국내철도 용달회사 또한 자본 부족으로 중단되고 그의 꿈은 외래자본주의 압박, 자신의 봉건성, 외래자본주의와의 타협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모두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박기종의 평가는 그가 세운 개성학교는 현재 개성고등학교(구부산상업고등학교)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고, 1995년 부산상고는 개교100주년 기념탑을 세우면서 기념탑 앞에 설립자 박기종 흉상을 세웠다. 또한 현재 부산 상공인의 구심적 단체인 상공회의소의 효시는 1889년 부산 객주 상법회사이다.1989년 간행된 [부산상공회의소백년사]에 수록된 역대 회장 사진 첫머리에 박기종 사진이 실려 있다.2001년 10월17일 부산경찰청 내에 개관된 부산 경찰역사전시관에는 부산경찰역사 인물로 박기종 전시코너가 마련되었었다.

  부산광역시에서는 2002년 12월 [부산을 빛낸 인물(20세기 이전 인물편)]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박기종은 여기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평가 여부를 떠나서 박기종은 부산근대사, 한국근대사에서 큰 자취를 남긴 것만은 틀림없다. 1907년 68세로 세상을  떠난 그의 유해는 수정동 선산에 묻혔다가 부산진 매축공사로 산이 헐려 일광으로 이장되었다.(박기종의 상경일기 해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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